▲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사직서 제출 없이 사용자가 “사표를 쓰라”고 반복해 말한 것은 일방적으로 근로관계를 종료하려는 ‘묵시적 의사표시’로서 해고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사용자의 노무수령 거부 경위와 방법, 노동자가 노무수령 거부에 보인 태도 등을 봤을 때 ‘확정적’ 근로관계 종료 의사라고 볼 수 있다면 해고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묵시적 의사표시에 따른 해고의 인정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버스기사 무단결근에 “사표 쓰라” 반복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그제야 복직 통보

8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해고된 전남 여수의 한 전세버스 운송업체 소속 기사 A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최근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20년 1월 상시근로자 7명의 소규모 전세버스 회사에 입사해 통근버스 운행을 담당했다. 그런데 입사 얼마 뒤 두 차례 무단결근하면서 회사와 마찰이 일었다. 회사 관리팀장 B씨는 그해 2월11일 무단결근을 이유로 A씨에게 버스 키를 반납하라고 했지만 거부하자 관리상무와 함께 직접 열쇠를 회수했다. 이후 A씨를 직접 불러 말다툼하는 과정에서 “사표를 쓰라”고 수차례 말했다. “해고하는 것이냐”고 A씨가 되묻자 “응”이라며 “사표 쓰고 가라”는 말을 반복했다.

A씨는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은 채 노동위원회를 찾았다. 사측은 3개월간 결근을 문제 삼지 않다가 A씨가 부당해고 구제를 신청하자 그해 5월께 갑자기 ‘무단결근에 따른 정상근무 독촉 통보’를 했다. 해고하지 않았으니 복귀한다면 즉시 근무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A씨는 회사가 부당해고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부당해고 기간의 임금을 선지급하면 복직하겠다는 의미의 내용증명을 보냈다. 회사는 재차 “해고한 적 없다”는 취지로 복직을 독촉했다.

전남지방노동위원회는 같은해 6월 A씨의 신청을 기각했고, 중노위도 초심을 유지했다. 회사의 일방적 의사로 근로계약관계가 종료됐다고 보기 어려워 해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A씨는 “B씨의 ‘사표 쓰라’는 발언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해고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부당해고”라며 2020년 12월 소송을 냈다.

대법원 “우발적 표현 아닌 확정적 의사”
“대표가 묵시적으로 승인했을 소지 커”

1·2심은 중노위 판단이 옳다고 보고 회사 손을 들어줬다. B씨가 “사표 쓰라”고 한 것은 A씨의 무단결근 이후 무례한 언행에 화를 내는 과정에서 이뤄진 ‘우발적 표현’으로서 사직서 제출을 종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분명한 사직의 의사표시를 한 적도 없다”며 “B씨의 발언만으로 근로계약관계가 종료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B씨의 언행은 일방적으로 근로관계를 종료시키고자 하는 의사표시라고 봤다. 먼저 구체적인 기준을 설시했다. 재판부는 묵시적 의사표시에 따른 해고 인정 여부는 △사용자의 노무수령 거부 경위와 방법 △노무수령 거부에 대해 근로자가 보인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방적인 근로관계 종료에 대한 ‘확정적 의사표시’ 여부를 이 같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러한 법리를 기초로 부당해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관리팀장이 관리상무를 대동한 상태에서 A씨에게 버스 키 반납을 요구하고 회수한 것은 근로자의 노무를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미”라며 “사표를 쓰고 나가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등 언행을 한 것은 A씨 의사에 반해 일방적으로 근로관계를 종료시키고자 하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사표 쓰라”는 말이 단순히 우발적 표현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다.

나아가 회사 대표가 묵시적으로 해고를 승인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봤다. 소규모 회사의 특성상 노동자의 노무수령을 거부할 경우 인력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데도 “사표 쓰라”고 발언한 것은 회사 차원의 결단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재판부는 “원심은 관리팀장 발언의 경위와 관리상무가 관여한 정도, 대표의 묵시적 승인 여부 등을 면밀히 심리한 후 해고 존재 여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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